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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역사, 인물 소개

정여립과 기축옥사 대하여 (정여립 모반사건)

by 윤쓰다 2022. 1. 14.

정여립

 


정여립 (1546 ~ 1589)

조선 중기의 문신

출생: 조선 전라도 전주부

사망: 조선 전라도 진안군 죽도

사인: 자살 또는 암살


"그는 죽었으나 그의 정신은 살았다."

 

원평 일대에서는 지금도 입바른 말을 잘하는 이에게 "너 정여립 알지?" 하고 묻는다고 한다. 정여립처럼 바른말 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는 협박조의 말이란다. 또 한 마을에서는 시비가 엇갈리는 사건이 발생하면 "정여림이 데려다가 물어봐야겠다."고 하는데 그만큼 정여립의 판단력이 뛰어나다는 뜻이란다. (모악향토문화 연구회의 최순식 선생이 전한 이야기이다.)

 

금산면 선동리에 있는 상두산 정상에는 정여립이 부하들과 함께 무술을 연마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는 것이, 원평 일대에서는 정여립을 반역자가 아닌 신화적 영웅으로 여기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 반역자였던 그의 말로는 너무도 비참했다. 족보에서 지워졌고, 삼족의 씨가 말랐으며 그와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사람들은 고문 또는 처형을 당했다. 그의 집은 부서지고 그 터는 파헤쳐져 끝내 연못이 되었고 선조는 정여립의 조상 무덤을 파헤친 후 뼈를 갈아 바람에 날렸으며, 그가 태어난 현이나 군은 없애버렸다. 그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정여립은 식년문과 을과 2등으로 급제하여 중앙무대에 진출한 인재 중의 인재였다. 이이도 그의 재주를 아껴 기회가 보이는 대로 조정에 천거하였는데, 정여립은 이이 앞에서조차 처세술을 펼치지 않고 임음 앞이라고 꼬리 내리지 않았다. 

"서인만이 이 나라의 사대부입니까?"

"동인에도 괜찮은 인물들이 많은데, 무조건 백안시하는 건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인데,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고 다르게 취급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이 생전 정여립이 한 말인데, 조선의 문신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일반적인 발언이 맞나 싶다. 그는 임금에게 건의할 때도 눈 똑빠로 뜨고 따지고 들었다고 전해지며 선조에게 '이 시대의 형서'라는 말을 듣고는 "지금부터는 용안을 뵐 수 없겠습니다." 하고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39세의 젊은 나이에 벼슬을 그만둔 데는 (이이를 비판한 것에 대한) 세간의 비난을 받은 이유도 있겠으나 (그의 성격이 고집 있었다는, 한편으로는 과감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선조에 대한 불쾌감이 더 큰 몫을 차지하지 않았나 싶다.

 

정여립은 전주로 돌아가 인근 읍 사람들을 규합해 반상의 귀천과 사농공상의 직업적 차별, 남녀의 성적 차별이 없는 대동계를 만들었다. 대동계원들은 매달 보름 글도 배우고 활 쏘는 법, 말 타는 법 등을 배웠고 정여립의 본가에서는 술과 고기, 음식들을 준비해 그들을 배불리 먹였다. 대동이란 이상사회를 뜻하는데 이때의 동은 사람들이 장막 안에 모여 대화하고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이고 대동사회는 천하위공, 즉 천하는 가문의 사물이 아니고 만물의 공물이라는 뜻이다. 또한 정여립이 살았던 호남 지방을 근거로 설명한다면, 수탈로부터의 해방이며 백제유민으로 신라와 고려 왕조를 거치면서 품었던 한이 없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렇게 더 나은 세상,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그의 바람과 신념은 확고했다.

 

보통 기득권층은 변화와 개혁을 싫어해 보수가 되기 싶다는 통설이 있다. 이때의 보수란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법과 제도를 옹호하며 유지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정여립은 달랐다. 그는 굳이 위험을 감안하며 무언가 변화시키려 하지 않아도 앞길이 탄탄한 자였음에도 봉건사회 강령과 정면 충돌하는 '천하는 만인의 것'이라는 사상을 내세웠던 것이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건 한과 비애는 있으며 그것은 그곳을 살아가는 이들의 숙명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여립의 댇동은 반제, 반봉건 이상의 한과 비애로부터의 자유를 외쳤다. 그 시대에는 일반적이지 않았을, 정여립의 신념은 그를 시대의 스승으로 만들었으나 기득권들에게는 불안의 씨앗으로 작용했고 결국 그는 진안 죽도에서 의문사하였다.

 

400여년이 지난 현재, 사건에 대한 수많은 논쟁이 있었으나 기축옥사에 대한 진상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수의 역사학자가 정여립이 반역자가 되었음에도 그를 높이 평가한 것은 사실이다. 신채호는 그를 루소에 버금가는 혁명적 사상가라고 하였고 국사학자 이병도는 정여립과 기축옥사에 대해 '그는 대모략가이자 야심가였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역모의 구체적 증거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에 대한 의문 때문인지 역모 자체를 부정하는 의견도 다수 제기되었다.

 

- 정여립 행적 관련 기록은 모두 그가 역모를 준비했고, 역모를 시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급박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각색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정여립에 대한 기록을 보면 찝찝함이 남는 때가 많다. 정여립에게는 고변을 하려면 할 수 있는 (한 달도 넘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정여립 일파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개연성이 떨어진다. 땅에 칼을 꽂고 자기 목을 찔러 죽었다는 기록은 앞뒤가 맞는가..? 선조가 그토록 중시했다는 적가문서에서 또한 역모를 꾸민 것에 대한 기록은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 

 

전주천에서 전주시청으로 가는 길에는 '대동길'이 생겼다. 황방산 자락 혁신도시의 길에는 '정여립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또한 정여립의 집터에는 정여립 공원이 조성되었고, 기념관 또한 건립 준비중이다. 그의 고향에서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그가 세상을 바꿀 자였을지도 모른다는, 그가 살았다는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그토록 큰 피해를 입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다양한 양상의 '아쉬움'에 여전히 그를 기억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

 

그는 죽었고, 역사는 그를 지우러 애썼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여전히 높이 평가되며 그의 정신은 지역민의 정신이 되었다. 필자가 느끼는 한, 그는 이렇게 살았다. 정여립이 역적이든 죄인이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신분과 성별에 대한 제재에서 벗어나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마음 그 자체이다. 그의 그런 마음이 족보에서조차 사라졌던 사진의 이름을 새로운 시대에 들어 재조명될 수 있도록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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