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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역사, 인물 소개

[동양중세사] 원강석굴사원, 룽먼석굴사원, 돈황막고굴, 누란왕국, 소그드인, 장안

by 윤쓰다 2022. 2. 11.

 

# 동양 중세 3대 석굴사원

구분 원강 석굴사원 룽먼 석굴사원 돈황 막고굴
부제 간다라 미술의 중국적 수용 간다라 미술 사막에 구현된 극락정토
위상 1km 사암 40여개 (30년간) 2천여 석굴, 10만여 불상 천 년의 역사, 492개의 석굴,
5제곱킬로미터 벽화
양식 간다라, 굽타 양식 초기 석굴,
불상 양식
① 간다라 미술의 중국적 정화
② 중세 유라시아 코스코폴리탄의 보편적 인간 얼굴 (동서문명교류)
다양한 문화 융하봐 여러 세력간
쟁탈의 역사
▶ 복합적, 다층적
특이
사항
하나의 석굴 = 독립된 사원 ① 당나라, 석굴 번영
② 봉산서 대불 완성
③ 17.14m 노사나불

① 야수파 회화에 영향
② 극락정토의 세계 표현

  

# 돈황

돈황 막고굴 불화 / 돈황 막고굴 (사진 출처: 나무위키)

돈황은 장안과 중앙아시아의 상인들에게 비단길의 시발지이자 마지막 기착지였다. 또한 동서양의 민족과 종요가 교차하여 독특한 세계적 문화 특성을 보였다. 서역과의 교류를 바탕으로 당의 문화는 국제적으로 성장하였고, 이는 당 황실 능묘의 화려한 유물들로 나타난다.

돈황 석굴은 그 수가 무려 1,000여개가 되며 이 유적은 귀족, 왕적의 후원으로 만들어졌으며 불교가 서역을 거쳐 인도에서 유입되었을 무렵의 것으로 추정된다. 전성기 중원풍의 것은 물론 쇠퇴, 형식화된 밀교 시대에 이르기까지 것 등 석굴 하나하나에 그 시대와 문화가 반영되어있다. 벽화의 소재를 통해 그 시대의 불교 사상을 엿볼 수 있으며 묘사된 풍속으로부터 그 시대의 문화를 알 수 있다. 지배 민족이 바뀌면 벽화나 불상의 모습 또한 완전히 바뀌고 기술이 예술로서 꽃피우다 결국 쇠퇴해가는 모습도 역력히 보인다.

이곳은 20세기 초, 대탐험 시대.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고 오럴스타인, 폴 펠리니 등에 의해 훼손되었다.

 

 

# 누란왕국

누란(크로라이나 왕국): 누란의 미녀를 통해 기원전 19세기부터 사람들이 정착한 것으로 추정
(실제 DNA 조사한 결과: 그보다 더 전 사람이었언 것으로 밝혀짐)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타림 분지에 위한 실크로드 교역에서 중요 역할을 한 국가
기원전 77년 누란의 왕 안귀가 한의 사절인 부개자에게 암살당한 뒤 한나라 치하로 들어감

누란의 미녀 (사진 출처: 나무위키)

실크로드 서역 남로의 중요한 중계거점으로 번영한 오아시스로, 여러 세력의 침입과 자연의 변화를 거쳐 6세기 이후 멸망한다. 헤딘이 처음 누란을 발견한 이후 롭 노르 (방황하는 호수)의 비밀이 밝혀지는데 이는 유사현상으로 호수가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에 관한 내용이다.

사막 속에 잠들어 있던 유적지에서는 불상과 불화, 사원 유적, 다수의 문서 등이 발견됨으로써 전설로만 존재했던 누란 왕국의 실체가 어느 정도 드러나게 되었다.

누란 왕국은 실크로드 동부 지역의 요충지였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실크로드의 중국 쪽 출발점인 돈황에서 사막의 모래바람을 이겨가며 약 16일 정도를 이동할 시 롭 노르 부근에 있는 누란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누란 왕국의 전체 인구는 약 2~3만 명이었으며 이만큼의 인구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자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누란은 그만큼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나라였음을 의미한다.

 

# 소그드인

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에 사는 이란계 민족
마사게타이의 후손으로 추정
3세기~8세기 돌궐제국 비호 아래 동서무역 장악

 

소그드인 (사진 출처: 나무위키)

중앙아시아의 이란계 민족, 일찍부터 동서교역에 종사하여 상술에 능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비옥한 오아시스 지대의 교통요로에서 활동한 소그드인들은 역사적으로 주변 국가들의 치하에서 여러 문화를 체험하며 동서교역에 종사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국가를 건설하지는 않았으나 네트워크를 활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기에 개방적, 국제적인 당나라 시기 발전의 정점을 이룩한다.

소그드어는 고대~12세기까지 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 지방의 소그드인들이 사용하던 언어로 내륙 아시아의 국제무역어로 널리 사용되었으나 투르크인과 몽골인들의 계속된 침입으로 죽은 언어가 되고 말았다.

소그드인 중에는 당나라 관료로 편입된 이들이 있다. 그러나 절도사 안록산의 반란으로 당이 대거 축출하며 그들의 역사는 기록 없이 사라졌다. 현재 우리는 그저 벽화, 당삼채를 통해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 당과 장안

장안중심고루유적

남북조시대를 종식시키며 진한을 이어 다시 출현한 제국 수당. 이 제국은 북조정권이 이룩한 통일로 통합제국의 당위성을 재확인하였고 개방적, 개방적, 다민족적 동아시아문화권을 형성하였다.

당은 종교적, 민족적 관용성을 가진 제국으로 소그드인을 비롯한 이민족을 중용하였으며 적극적으로 서역을 경영하였다. 이때 탈라스전투에서 패하면서 중국의 제지술이 이슬람을 거쳐 유럽까지 전파되었다.

장안은 2천여년 간 13개 왕조의 수도로써 동아시아는 물론 유라시아 문명의 센터였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인구 백만의 최대 규모 성곽도시였으며 반듯한 격자형 도시였다. 또한 동시와 서시가 성행하는 동아시아적 공간이상이 구현한 제국의 수도였다. 무엇보다 실크로드의 거점이자 종점으로 세계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외척읙 권력행사, 안사의 난, 장원의 확대, 황소의 난 등으로 인해 당은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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