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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역사, 인물 소개

호남 의병에 관한 기록 :: 안방준의 <호남의록>, <삼원기사>

by 윤쓰다 2022. 2. 13.

 

 

 

 


안 방 준

 

조선 중기의 학자 /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동

출생: 1573년 (선조 6)

사망: 1654년 (효종 5)

호남의록: 1616년 집필

출신지: 보성

본관: 죽산


은봉 안방준의 종가와 종택

호남 의병에 관한 기록은 개인적이기보다 집단적이다. 그중에서도 호남을 의향적 이미지로 최초로 기록한 것이 안방준의 <호남의록>인데, 임진왜란 2년 반 전인 1589년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 한준과 안악 군수 이축 등이 진안 죽도에서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함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이 고변을 계기로 서인은 동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했고, 서인중에서도 강경파에 속했던 정철이 이발, 이길, 정언신, 최경영, 백유양, 정개청 등 동인계 인물들을 처형 또는 귀양보내며 가혹하게 다스렸다. 정여립 관련 천여명의 동인계 인물들은 피해를 입고 크게 위축되어 정철은 '동인백정'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 여파로 전라도는 '반역향'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함양이 함락된 뒤, 5월 9일이 되어서야 선조는 평양에 머물면서 정여립 사건에 대한 연좌제를 더이상 시행하지 않겠다는 사문을 내렸다.

임진왜란 이후 전라도에서는 많은 의병들이 일어났는데 그 대부분은 나주에서 기병한 김천일, 담양에서 회맹한 고경명, 보성에서 일어난 전라좌의병 임계영, 화순에서 일어난 전라우의병 최경회 등이다. 전주를 포함한 전라북도 지역의 의병 봉기는 미미한 편이었고, 전라남도 지역의 서인 계열 인물이 주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현상은 정여립 사건의 여파라고 볼 수 있겠다.

안병준은 포은(정몽주)와 중봉(조헌)을 사모하여 두 사람의 호에서 한 글자씩 딴 자신의 호 '은봉'에서도 알 수 있듯 일생동안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절의를 중시한 인물이었는데, 재야에서 국난을 당하여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의 업적을 밝히고자하였다. 전라도 인물의 충절사적을 제일 먼저 기록한 문헌이 안방준의 <호남의록>과 <삼원기사>다. 1618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 두 문헌은 합철되어 1626년 송광사에서 목판본에서 간행되었다.

<호남의록>은 1607년 무렵 (월정)윤근수를 만나 대화하던 도중, 윤근수가 임진왜란 때 의롭게 죽은 자로서 고경명과 김천일 외에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자, 안방준이 최경회 이하 10여명의 언행과 사적을 말하니 월정이 그들의 기사를 써서 보내주면 서발을 붙여 길이 전해지도록 하겠다고 말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월정의 뜻을 받들지 못한 채 월정이 세상을 떠나고야 그를 추모하고자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고로 <호남의록>은 최경회 이하 16인의 의병이 절의를 지키다 순절한 내용의 전기다. 당시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의병이었고, 이들에 대한 정보는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16명 중 전남 출신은 12명, 전북 출신은 4명이었고 전사한 나이대는 20대~60대까지 다양하다. 정유재란 때인 남원전투 때를 제외하면 전라도 의병들의 전투지는 전라도 외 지역인데, 의병은 본래 자신의 터전을 지키고자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군대라는 군대라는 점이 특징이나 호남의병은 그렇지 않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 전라도 의병은 처음부터 근왕군의 성격이 강했으며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지키기 위해 타지역으로 원정간 것으로 보인다.

<호남의록>의 백광언 기사에는 백광언이 정여립을 하찮게 보고 비록 귀양 갈망정 조헌을 존경했다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를 보아 안방준의 기록은 철저히 서인 중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이 바다에 둔치고 나아가 싸우려하지 않자 남해안 바닷길을 잘 알던 정운이 결사적으로 싸울 것을 주장하여 선봉이 되어 싸우다 전사했다는 기록도 동인이었던 이순신보다 정운을 더 높이 평가하려던 의도가 드러난다. <호남의록>은 이처럼 당파적 시선이 개재된 문헌이기도하나 당시 조정을 비롯한 중앙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지방 의병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문헌이다. 안방준은 반역의 고장으로 호남이 낙인찍힌 것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삼원기사>에서는 호남출신 김덕령, 김응회, 김대인 등 세 사람이 무고로 사망한 사실을 밝힌 글이다. 김덕령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용맹을 떨치며 눈부시게 활약하였으나 조정에서 왜군과 강화를 모색하느라 진군을 중지하라고 내린 명령세 맞서 여러 차례 출신을 청하였으나, 경상우병사 김응서 등이 모반에 가담했다고 모함하여 옥사하게 된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의병들]

* 김천일(나주): 나주에서 고경명과 함께 의병 활동. 서울 결사대 잠입. 진주성 사수하려다 성 함락되자 남강 투신자결

* 고경명(장흥): 6,0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의병장

* 임계영(장흥): 보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장수 ~ 거창 ~ 합천 ~ 성주 ~ 개령 등지에서 일본군 무찌름

* 최경회(능주): 의병 모집, 남은 병력 수습하여 의병장 추대. 전주, 남원 향하는 일본군 장수와 싸움, 우치지 크게 격파

 


내용 출처: 호남의록 삼원기사 (안방준 지음, 신해진 옮김)

교보문고 :: 호남의록 삼원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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