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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역사, 인물 소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이봉창의사에 대하여

by 윤쓰다 2022. 1. 17.

 


이봉창

독립운동가

출생: 1901.08.10

사망: 1932.10.10 (32세)

소속: 금정청년회, 한인애국단


중학교 3학년 때, 한국사 인강을 듣다가 운 적이 있다. 한참 감수성이 풍부할 때여서 눈물이 났는지, 지금도 그 내용을 처음 듣는다면 그때처럼 눈물이 날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나에게 인상 깊게 다가왔던 역사의 한 부분에 대해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독립전쟁의 전개라는 단원에서는 우리나라를 위해 힘써온 존경스러운 독립운동가분들이 많이 소개된다. 그중에서도 오늘 소개할 인물은 이봉창 의사다.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과자점 점원으로 일한 경력이 있고,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철공소 직공으로 일하다 일본인의 양자가 된, 일본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었다. 기노시타 쇼조라는 이름으로 도쿄, 오사가 등지를 전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봉창 의사는 상하이로 건너가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고 이렇게 말한다. "김구 선생님, 저는 일본 말을 굉장히 잘 합니다. 제가 일본에 들어갈 때 아무도 저를 막지 않을거에요. 절 일본 사람으로 알테니까. 제게 폭탄을 주시면 일본으로 들어가 국왕을 제거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김구선생은 초반에 그를 의심하였고 제안을 승낙하지 않았으나 결국 결국 그의 진심을 알게됐고, 한인애국단에 가입시켰으며 이후 폭탄을 건네준다. 

 

이봉창은 궁성으로 돌아가던 일본왕의 마차가 두 개인 것을 확인하고는 앞에 가던 화려한 마차에 두개의 폭탄을 모두 던진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국왕은 뒤에 있던 마차에 타고있었다.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봉창 의사는 1932년 9월 30일 오전 9시 350명의 경찰에 둘러쌓인 가운데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하신다. 

 

일제강점기, 의거 전에는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이봉창의 사진을 찍던 당시 김구 선생은 "이런 상황이 너무 슬프네." 라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일본에서 고아로 힘든 어린 시절은 보냈고, 한국에서도 일본말을 더 잘하여 소외된 인생을 사셨음에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봉창 의사. 그의 상황을 잘 알고 계셨던 김구 선생은 눈물을 참을 수 없으셨나보다. 이런 김구선생에게 이봉창의사는 말씀하셨다.

"스승님, 울지 마십시오. 저는 영원한 삶을 살러 가는 것입니다."

 

광복 후 귀국한 백범은 이봉창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1946년 서울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했고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역사를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현재 우리가 이렇게 안전한 국가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은 목숨까지도 바쳐가며 희생하신 분들이 계신 덕분이다. 그분들의 인생을 잊지 않고 마음속으로 감사드리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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