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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전개과정

by 윤쓰다 2022. 1. 24.

부산진순절도


임진왜란: 1592.05.23 ~ 1598.12.16

정유재란: 1597.08.27 ~ 1598.12.16


임진왜란이란 1592년(선조 25년)부터 1598년(선조 31년)까지 2차에 거쳐 왜국이 조선을 침범한 사건을 말하며, 1차를 임진왜란, 2차를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통상적으로 1,2차를 합쳐 임진왜란이라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은 약 2백년 동안 전쟁이 거의 없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평화는 국방력 약화로 이어졌고 (조선 초기 설치된 국방 체제는 붕괴되어 정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4대 사화, 훈구·사림 간 정쟁은 중앙의 혼란을 지속시켰다. 대부분의 지배층은 붕당정치의 중심에 자리매김할 방법만을 모색했을 뿐 국방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율곡 이이의 10만 양별설처럼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국방 각화 정책이 제시되기도 하였으나 진지한 검토 및 실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은 달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종결하고 나라를 통일한 시점에서 (15세기 후반) 서양 상인 세력이 일본으로 몰려들자 상업 도시가 발달하였다. 도요토미는 신흥 상인 세력의 힘을 약화시키고 국민을 대통합시키기 위해 전쟁의 의지를 다지는데, 첫 번째로 '대륙 정복'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조선과 힘을 합쳐 명을 치자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선조는 거절하였고, 제안은 흐지부지된다.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주길 요구하나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지연된다. 

도요토미는 조선 정부의 반복된 거절 의사에 사신으로 갔던 신하의 가족까지 살해할 정도로 분노했는데, 정황상 조선이 삼포왜란 이후 무역량을 절반으로 줄인 것으로 입은 타격이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역 재개가 시급했을 것이다. 어쩌면 일본 도발의 근본적 원인은 '정권의 안정'보다 '경제적 안정'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일본 측에서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나 '노예 전쟁'이라 부르는 데는 이와 관련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실제, 이 시기 수많은 도공, 인쇄공, 학자들이 일본에 끌려간 후 에도 막부의 문화 중흥 시대가 열렸다. 일본의 궁극적인 목표는 애초부터 여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11월 중순쯤 선정된 통신정사는 황윤길, 부사는 김성일, 서정관은 허성이었다. 통신사 일행은 1590년 3월에 일본으로 떠나 이듬해 3월 한양으로 돌아왔는데, 황윤길과 김성일은 일본 정세에 대한 견해 차이를 보였다. 서인인 통신정사 황윤길은 일본의 조섬 침략을 주장했으나 동인인 김성일은 침략 조짐이 없다고 한 것이다. 조정은 또 한동안 동서 파당별로 갈려 논쟁을 되풀이하는 데 시간 낭비를 하였고 결국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나마 진행되고 있던 성곽 수축, 군비 정비마저 중단시켰다. 이후 선위사 오억령은 "일본이 다음해 조선 땅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하려 한다."는 보고를 하기도 했으나 묵살, 파직당한다. 이후 왜인이 본국으로 솬되어 왜관이 텅 비자 그제야 침략을 감지하나 때는 늦었다. 십만양병설, 황윤길의 판단, 오억령의 보고까지. 전쟁을 준비할 수 있는 계기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한 조정의 최후의 비참했고 역사의 평가 역시 냉정하다.

일본은 오랜 전쟁을 통해 연마한 병법, 무술, 축성술, 해운술 등을 정비, 신무기 조총을 대량 생산하며 전쟁 준비에 총력을 다하였고,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 20여만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다. 조선을 불과 20일만인 5월 1일, 수도 한양을 내줬고 6월, 평양을 내준다. 선조는 의주성에 피난 갔으며 일본군은 전라도, 평안도 일부 지역을 제외한 조선 팔도를 마구 유린했다. 함경도까지 적에게 내어준 상황에서 도망치기만 바빴던 선조는 요동 망명을 생각할 정도로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조선 제 15대 국왕 광해군 초상화

이렇게나 무능한 아버지를 보고 자랐을 광해군의 행적은 선조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광해군의 분조는 6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유지되었는데, 그는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 등지를 돌아다니며 민심을 수습하였고 병력을 모아 참전하는 등 지도자로서 책임을 다했다. 한편, 암울했던 전황 속에서도 전라도 지역 수군만큼은 결코 일본에 밀리지 않았는데, 이순신의 활약으로 연승을 거듭해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 의지는 완전히 차단하였다.

이듬해 1월 평양성을 회복, 전라도 관찰사 권율의 지휘로 행주산성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4월에 마침내 한양을 탈환하였다. 이렇게 전세를 역전시킨 데는 6월 이후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의 공이 컸다. 유생 조헌은 청주를 탈환,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왜군과 맞섰고 곽재우는 위장 전술과 유격전을 통해 경상우도를 지켰다. 전라도 담양에서 군사를 일으킨 고경명은 금산성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으며 전남 나주에서 기치를 든 김천일은 수원에서 적을 무찌른 후 강화도로 옮겨 가 연안의 적들을 공격했다. 그는 이듬해 진주성으로 입성하여 10만의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다. 평화로울 때는 본인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전쟁의 위기에서 그 진가를 드러냈던 난세의 영웅들이다.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모습을 묘사한 병풍 (출처: 위키백과)

1597년 1월 15일 일본은 다시 15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에 침입한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당시 수군 통솔권은 옥중에갇혀있던 이순신 대신 원균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가 7월 15일 왜군에 대패하고 전사하자 조정은 이순신의 지위를 급히 회복시킨다. 이순신이 명량에서 승리, 수군 제해권을 찾는 데 성공하는 한편 육지에서는 한때 심각한 침탈이 자행되고 있었으나 명의 원군, 임진왜란 후 마련한 대비책 덕에 일본군은 충청도 땅을 넘지 못했고 이듬해 8월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철군하기 시작한다. 11월에는 완전히 패퇴하였다. 6년 7개월 간의 조일 전쟁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피해가 막심했으나 이렇게나마 일본의 의지를 좌절시킨 데는 이순신의 수군, 의병의 공이 컸다. 관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패퇴를 거듭했으나 의병은 곳곳에서 왜군의 주둔기지를 습격하거나 이동 중인 왜군을 기습 공격해 타격을 가했다. 확인된 병력만 2만 3천 명이라는 그들의 활약은 왜군을 패퇴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조선 제 14대 국왕 선조

도망가는 선조 일행에 돌을 던지고, 대군들의 집에 불까지 지르는 등 조정에 반감을 가졌던 민중들이 이렇게 뭉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의병 운동을 주도했던 선비들이 현직 관료와 달리 민중의 지지를 받았던 개혁 세력이었기 때문일까? 무엇보다도 왜군의 만행에 분노한 민중이 자신들의 생활 터전을 스스로 지키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정에 대한 신뢰를 잃은 덕도 있겠다.) 이렇게나 간절한 마음으로 나라를 지켰던 의병들이 전후의 논공행상에서는 철저히 소외당했다. 심지어 곽재우는 산으로 들어가 숨었고 김덕령은 반란죄로 사형당했다. 선조가 자신의 권위 실추를 막기 위해 전쟁 영웅들을 배제 시키려 한 것을 보면 그도 본인의 만행이 떳떳하지는 못했던 것이라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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