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장르: 인문, 고전, 신화
지은이: 호메로스
옮긴이: 임명현
출판사: 돋을새김
‘역사를 아는 자의 시선과 모르는 자의 시선은 다르다.’ 사실 필자는 4년 전에 이 책을 읽고 토론을 진행한 적이 있다. 당시 이 책을 읽고 감명 깊었던 것은 기억나지만 확실하게 ‘무엇을 얻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까지는 없었다. 정확한 후기가 기억나지 않아 작성했던 토론 보고서 찾아 읽어보니 당시 나는 오디세이아의 문학적인 전개, 자극적인 내용. 그러니까 단순히 내용의 흐름에만 집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서양고대사에 대해 공부한 후의 나)는 얼마나 달라졌는지, 정확히는 같은 책을 읽고 느끼는 바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나는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고 싶어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기로 하였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책을 읽는 내내 당시의 역사를 떠올리고 상황을 그려가면서 내용을 이해하려 했다는 점이다. 정확한 수준까지는 아니겠으나 주인공의 이동 경로를 지도로 매칭시키고, 상황을 고대 역사와 연관시켜가며 책을 읽었더니 확실히 오디세이아를 더 깊이 이해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신기한 것은 서양고대사를 공부한 후로는 고대인들의 생활상이나 고대인들이 갖고 있던 생각, 관념, 신념 등의 추상적인 부분을 어느 정도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역사를 이해한 후 책을 읽으니 인물들의 행동에 사소한 의미부여나 추측 쯤은 할 수 있게 되어 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더욱 유익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독서 시간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의문은 ‘어디까지가 신화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가’ 하는 것이었다. ‘고대인의 시대에는 실제로 신이 인간과 함께 생활하였었는가?’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신과 함께하는 인간 생활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이 현실적이었다. 그만큼 고대인들의 생활 속, 마음 속에는 신이라는 존재가 언제나 밀접하게 닿아 있었고 모든 생활상 전반이 신과 종교를 통해 해석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신들이나 영웅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 문학가들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충분한 이성적 고찰에 의하여 전승함으로써 후세에 까지 영향을 끼치는 생명력이 부여되어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의 동굴에서 지내다 빠져나가는 부분이었다. “그는 밤에는 속이 빈 동굴 안에서 마지못해 원치 않는 남자로서 원하는 여자인 그녀 곁에서 잠들곤 했다. 그러나 낮이면 그는 바닷가 바위들 위에 앉아 눈물과 신음으로 슬픔으로 자신의 마음으로 괴롭히고 있고 눈물을 흘리면서 추수할 수 없는 바다를 바라다보곤 했다.” 이것은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의 동굴에 갇혀 있던 시기, 그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글이다.
이 글귀만 본다면 오디세우스는 고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것 같지만, 전반적인 내용을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던 것이, 고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부인과 아들을 생각해서 어떻게라도 이 섬을 빠져나갈 궁리를 해도 모자를 시간에 칼립소와 섬에서의 생활을 즐기고만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칼립소에게 마음을 연 것부터가 문제였고, 칼립소의 남편 대신으로 지내고 있는 모습이 퍽 살만해 보였다.
결국 고대 사회는 남성이 우위에 있는 사회였다는 것이 이렇게 드러나는 것 같다. 페넬로페는 고향에서 구혼자들을 어렵게 거절해가며 고독 속에 지내는데, 오디세우스는 이런 아내의 모습은 생각도 않고 칼립소와 즐기고 있는 것이 괘씸했다. 고대가 남성 중심 사회였다는 것은 다른 부분에서도 알 수 있다. 남신들은 마음껏 인간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지만 여신들은 그렇지 못했다. 아르테미스는 남자 사냥꾼이 자신의 몸을 봤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사슴으로 만드는데, 이를 보아도 여성에게만 강요하는 무언가가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칼립소도 또한 이에 대해 부당하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해진 요즘 같은 사회에서는 부당하다고 느낄 수 있는 장면들이다.
“그대가 정말로 지금 당장 이대로 사랑하는 고향 땅에 돌아가시기를 원하시나요? 그렇다 하더라도 편히 가세요. 그러나 만약 그대가 고향 땅에 닿기 전에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할 운명인지 마음 속으로 안다면 날마다 그리는 그대의 아내를 보고 싶은 열망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곳에 나와 함께 머물며 이 집을 지키고 불사의 몸이 되고 싶어질 거에요.”
인상적인 구절이다. ‘고난을 겪어야 할 운명’이라. 그리스의 문학, 특히 다양한 비극 작품 속에서도 운명론이 등장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운명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수없이 고민했던 것이 아닐까. 또 그 운명이라는 것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또는 극복해야 하는 것인가 고심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귀향의 날을 보기를 말마다 원하고 바란다오. 설혹 신들 중에 어떤 분이 또 다시 포도줏빛 바다 위에 나를 난파시키더라도 나는 가슴 속에 고통을 참는 마음을 갖고 있기에 참을 것이요. 나는 이미 너울과 전쟁터에서 많은 것을 겪었고 많은 고생을 했소. 그러니 이들 고난들에 이번 고난이 추가될 테면 되라지요.”
오디세우스는 코앞에 고난이 닥칠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이는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에 관한 소식을 알아내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고, 그 과정에서 고통과 삶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결국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감내하여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과 비슷한 맥락이다. 호메로스는 자신의 작품 속 인물들을 통해 고난을 참아내고 승리하는 인간의 모습, 또한 고난을 겸허히 자세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독일 철학자 니체는, 운명은 필연적인 것으로 인간에게 닥쳐오지만 이에 인종하는 것만으로는 창조성이 없고, 오히려 이 운명의 필연성을 긍정하고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 본래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주어진 상황을 어쩔 수 없이 수긍하는 자세가 아니다. ‘운명을 진심으로 끌어안고 사랑할 때 인간다워진다는 것’. 그것이 그것이 니체의 ‘아모르 파티’이며 이는 오디세이아의 전체 주제와 연관되는 부분이 있는 듯하다.
오디세이아에서 말하는 운명은 일반적으로 많은 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태어난 순간부터 주어진 운명’이 아닌 듯하다. 그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충분히 맞닥뜨릴 수 있는 수많은 상황. 가끔은 부정하거나 숨어버리고 싶어지는 아주 일상적인 상황. 그 상황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어쩌면 호메로스는 ‘날 때부터 타고난’ 운명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의 풍랑과 같은 고난을 수없이 겪어야하는 험난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을 더욱 긍정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또한 더욱 의연하게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의미의 ‘운명’을 감내하고, 사랑하며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18일만에 파이아케스족의 땅에 가려하지만 포세이돈이 에디오피아족의 제물을 받고 돌아가다가 오디세우스를 발견하고 삼지창을 휘둘러 폭풍을 일으킨다. 이때 오디세우스는 칼립소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자신을 비참히 여기고, ‘차라리 트로이 전쟁에서 죽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마저 한다. 이 모습은 새로운 일 등에 도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일이 틀어질 때 겪게 되는 우리의 심리적 고통과도 관련이 있는 듯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며, 그 선택에 대한 후회는 끝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디세우스의 항해는 우리 인생의 항해와도 닮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때, 바다 요정 이노 라우코테아가 등장하여 뗏목에서 뛰어내려 헤엄을 쳐서 파이아케스까지 갈 것을 조언하며 자신의 머릿 수건을 던져주었고, 오디세우스는 칼립소가 준 뗏목을 버리고 옷을 벗어던졌다. 그런 오디세우스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포세이돈은 삼지창을 거두어들였다.
이 대목이 호메로스가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싶다. 삶 속에서, 도전 속에서, 사람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되는 고난, 시련, 나아가 운명의 상황은 그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서도 결국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다는, 구원자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면 결국 모든 상황의 승리자는 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더욱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끝내 뗏목과 옷을 버린 오디세우스의 자세인 듯하다. 자신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것.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자신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것’. 그것이 오디세우스를 통해 호메로스가 말하고 싶었던 인생을 살아가며 한 번쯤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가 아닐까.
뗏목 하나에, 옷가지 하나에 의지하며 순간의 상황에 연연하는, 또는 부질없는 일에 얽매이고 애쓰는 모습은 어쩌면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닐까 싶다. 나는 나의 성장을 위해 나에게 남은 물질적인 가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인가 라는 질문을 해보았다. 그동안의 나를 되돌아본 결과 나는 오디세우스처럼 홀연히 내게 남은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죽을힘을 다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실은 아직 이룬 것도, 지켜낼 것도 없는 상황임을 앎에도 무엇이 그리 아깝고 소중했는지 애써 지키려고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모든 것이 욕심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적시에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버릴 수 있는 결단력이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오디세이아는 고난의 끝자락에 도달했을 때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책이었다. 20대 중반, 앞으로 어떤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이 많은 시점이다. 아직은 고난의 끝자락이라고 할만한 위기까지는 겪어보지 않았다. 좋은 일만 가득한 인생이면 좋겠으나 예상치 못한 일들이 풍랑으로 다가올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다. 그 순간이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내가, 이겨낼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을 내가 그 순간에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그때의 나는 고통을 사랑하라는 말이 와닿지 않는 사람일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뗏목 하나에 얽매이는 인생은 살지 말아.’라는 조언을 해주고 싶다. 이 말을 들으면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주어진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듯하다. 또한 위로가 될 수도 있을 듯하다.
오디세이아를 두 번 읽으며 내린 결론, 오디세이아는 ‘자아 성찰의 책’이라는 것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여러 방면에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동, 선택, 언행들을 통해 어떠한 상황이 닥쳤을 때 나는 어떻게 그 상황을 대처할 수 있을지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해보았다. 어떻게 수 천년 전에 살았던 고대인들의 글과 문화가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그것을 통해 시대를 관통하는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의의임이 분명하다.
참고: 유튜브 노마드 오디세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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