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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기인문학(명언으로 읽는 고전의 즐거움)

by 윤쓰다 2020. 9. 26.

사기인문학을 읽고서...


분야: 중국고전

지은이: 왕서우보

출판사: 휘닉스


중국의 역사와 문학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이에 관해 학습한 내용과 조사한 바를 바탕으로 논문을 작성해보려고 한다. 중국의 고전이 오늘날까지 중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것이 고금의 대화가 가능하고 과거와 현재의 교류가 활발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중국인의 생활 속에서 중국문학이 여러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이렇듯 고금의 대화가 가능한 가장 큰 비결은 한자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16세기에 만들어진 시경을 비롯한 많은 글에서 한자는 여전히 사용되었고 조금씩 변화하긴 했지만 그것은 서체의 변화일 뿐 글자의 완전한 변화는 아니다. 이는 현대 인도인들이 고대 인도어를 알아볼 수 없는 것과는 큰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인구가 많고 땅이 넓어 고대에서부터 수많은 작가와 작품이 탄생하였다. 이런 작품의 탄생에서 중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었던 문학 담당층이 계층이었는데 그들은 당시에 정치와 문학을 동시에 진행하는 지식인이었다. ‘계층이 후대의 사인계층으로 성장하고 사인들이 수많은 문학을 써내려가는 과정에서 고대에서부터의 역사가 그 내용에 반영되지 않았을 수 없다. 우리는 문학을 통해서 다양한 중국의 모습에 대해 공부할 수 있다. 이런 중국 고대의 수많은 모습들에 대해 느낀바 등을 서술하기 위하여 중국 고대의 청동기’,‘삼성퇴문화등의 하나의 주제보다는 문학과 역사라는 통합적인 주제로 레토프를 작성하도록 하겠다. 지금부터 중국의 문학, 그 중에서도 사기 인문학이라는 책을 중심으로 다양한 이야기들을 해보도록 하겠다.

 

문이재도는 문장은 문장으로서 도를 싣는다는 뜻으로 정치,사상, 철학의 도구임을 뜻한다. 수레에 사람이 타는 모양을 상상해보면 수레가 문장이고 사람이 도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문장으로서 정치 사회를 표현해냈다. 우리는 중국의 시가 하면 가장 먼저 시경과 초사를 떠올릴 수 있는데 북방의 주나라에서 탄생한 시경과 남방의 초나라에서 탄생한 초사는 중국 문학의 흐름을 연 의미 있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이글은 통해 중국 고대의 모습이 현실지향적 성격을 지녔고, 팍팍한 삶의 현장이 생생하게 재현되었으며 환경과 날씨의 차이에 의해 두 국가의 생활상이 확연히 차이 났음을 알 수 있도록 한다. 그 중에서도 작가가 확실한 초사와 달리 시경은 민중의 노래였다. 민가의 풍속을 채집하여 만들어진 시경은 자연스러운 생활을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남자가 아가씨를 그리워하는 노래, 아내가 멀리 부역을 나간 남편을 그리워하는 노래, 제사지낼 때 부르던 노래, 예의 없는 남자의 청혼을 거절하는 여자의 노래, 노처녀 아가씨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 등 우리는 이런 글을 통해 중국 고대의 문화나 예를 중시하는 모습, 유교의 침투 양상 등에 대해서 추측할 수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기 인문학을 바탕으로 본 중국 고대사의 모습을 파헤쳐 보기로 하겠다.‘孺子可敎(유자가교)’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이는 한나라의 건국공신 장량에 관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진말 귀족 출신으로 진시황제를 암살하려다 실패해 신분을 숨기며 살아가다가 한 노인을 만나 노인의 가르침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평가에 책을 받아 공부하여 태공병법 을 연구하여 고조 유방의 책사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이 내용을 통해 강력한 권력을 지닌 진시황제를 암살하려던 반대파 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고, 용케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갔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또한 태공병법을 열심히 연구하여 결국 유방의 진영에 서 책략과 계획을 짤 수 있는 인물로 성장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역시 노력은 모든 인간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된다. 유방은 무장으로는 한신에게 의존하였고 지혜로는 장량에게 기대어 항우를 패배시키고 천하를 통일시킬 수 있었다. 이후 유방은 신하들을 믿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실태에 이르렀으나 장량만은 선견지명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천하통일 후 유방이 제후를 중심으로 한 봉건제도를 실시하려 했으나 장량이 이를 막고 중앙집권의 기초를 닦아주기도 하였다. 한 대의 왕은 경제권과 승상을 제외한 관리 임명권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한정된 세금의 징수와 역을 부과할 권리 또한 지녔고 그 밖의 지역은 군현제로서 중앙에서 직접 다스렸다. 이러한 한나라의 정치는 과거 주의 봉건제도에 비해 중앙집권 체제로서의 기질을 확립시켜나갔고 이런 중앙집권 확립에 기여한 것이 장량이라고 할 수 있다. 장량의 인생은 우리에게 여러 교훈을 선사한다. 먼저, 자신의 조국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의 면모에 대해 말한다고 할 수 있고 둘째, 자신을 알아봐준 사람을 배신하지 않고 의리를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 욕심 부릴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한 발 물러나는 지혜를 발휘함으로써 목숨을 잃지 않은 것을 보며 진퇴할 수 있는 지혜를 선사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태공병법을 건넨 황석공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것은 위의 내용 외에는 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바가 아직은 없었다. 사기 <유후세가> 에 나오는 일화가 다인 것이다. 우리는 그가 우월한 문장솜씨를 지녔고 선경지명의 지혜가 있었으며 인재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 정도만은 추측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런 황석공의 면모도 우리에게 여러 교훈을 선사한다. 사기는 이처럼 한 인물로 하여금 그 사람의 인생에서 교훈을 주는 책임을 알 수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한국 사람들도 많이 알고 있는 이 말은 중국 고대의 병법서인 손자병법 에 쓰인 말이다.손자병법 의 저자인 군사학자 손무는 오왕에게 자신의 저서를 들고 찾아갔고 오왕은 손무의 능력을 시험해보려 궁녀 180명을 선발해 훈련을 시켰다. 그런데 손무가 명을 따르지 않으면 처벌하겠다고 경고하여도 궁녀들은 명령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그를 비웃었다. 그는 설명을 잘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고 다시 한 번 설명하였으나 웃기만하는 궁녀들을 보고는 결국 양쪽 진영의 대장의 목을 베어버리고야 말았다. 그러자 궁녀들이 아무리 복잡한 동작을 실시하여도 열심히 따라하며 더는 장난으로 여기지 않았다.

우리는 이 책의 내용을 통해 여러 중국 고대의 모습들에 대해 떠올려 볼 수 있다. 오왕이 손무의 저서를 시험하기 위해 궁녀를 동원했다는 대목을 통해 무신들도 어느 정도 인정받는 사회였다는 것, 궁녀들이 장군의 말을 쉽게 듣지 않은 대목을 통해 장군의 지위를 궁녀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라는 점, 말을 듣지 않는 궁녀의 목을 베어버린 장면을 통해 사람을 죽이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거나 궁녀의 신분이 하찮게 여겨졌다는 것 등을 말이다.

손무의 손자병법 은 그가 살아있을 당시를 넘어 이후 왕조에서도, 중국 왕조를 넘어 조선에서도, 타국을 넘어 오늘날까지도 군사학적으로 활발히 연구가 진행되는 중이라고 한다. 그만큼 이 책이 군사체계나 전술, 또한 국가의 흥망성쇠 뿐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여러 교훈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그리고 의미 있는 책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진부한 생각들에 더해 또 다른 여담을 하자면 예나 지금이나 좋게 말할 때는 사람을 만만하게 보며 얕보지만 무력이나 체벌을 가할 때 그제 서야 기세가 약해지는 인간의 모습은 연약하고 어리석어보이지 않을 수 없다. 역시 사람은 언제든지 타인의 말을 흘려듣거나 그 뜻을 함부로 생각하지 않고 존중할 줄 알아야한다. 이렇게 사기는 우리에게 다양한 교훈을 선사한다.

아직 22, 친구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필자는 刎頸之交(문경지교)’의 이야기에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인상여가 큰 공을 세우고 상경에 임명되어 자신보다 높은 관직에 있게 되자 염파는 크게 분개했다. 하루는 인상여가 마차를 타고 가다 염파의 마차를 보고 급히 방향을 틀었고 그 덕에 염파의 마차가 먼저 지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하인의 불평에 인상여는 지금 가장 강력한 진나라도 감히 조나라를 침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나와 염장군이 있기 때문이다. 나와 염장군이 서로 다투기라도 한다면, 진은 그 기회를 타 당장 조나라를 침략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염장군에게 계속 양보하는 것이지 그가 두려워 이러는 것이 아니네. 모든 것이 다 나라를 위한 것이야.”이 말은 염파의 귀에도 들어갔고 염파는 부끄러워하며 진심으로 인상여에게 사죄하고 생사를 같이하는 친구가 되었다.

인상여는 조나라의 명신이자 책략가로 조가 진에게 곤란한 협박을 당했을 때도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용기와 지혜로 소양왕의 무리한 요구를 슬기롭게 거절한 충신이었다. 이렇게 위에서부터 계속하여 소개되는 책략가라는 사람들의 면모를 통해 우리는 어떠한 일이나 상황의 변환을 위한 변환책 등을 마련하는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전쟁을 치르지 않고 국가 사이의 권력 다툼과 우위 입증 등의 일을 슬기롭게 해결한 그의 모습을 보며 우리 역사 속 서희의 외교담판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어쩌면 백성들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최대한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하여 국가를 지키는 일은 가장 큰 국가에 대한 충성을 행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국가에 충성하고 중요한 책략을 만들어나가는 인재적인 모습보다도 위의 일화에서 말해주는 그의 겸손과 선견지명의 모습에서 우리는 더 큰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의 작은 실수로 인해 커질지 모르는 국가의 위기, 그리고 타인고의 갈등을 최대한 막고자 자신의 수고를 더하기로 생각하는 그의 모습은 이기적이었던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고 다른 이들을 용서하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듯하다. 용서란 참 어려운 것이다. 더군다나 나를 싫어하고 헐뜯는 사람을 포용하고 받아주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용서하였을 때 그 사람과 비로소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염파의 입장이라면 제 3자를 통해 인상여의 배려에 대해 듣게 되었을 때 그동안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부끄러웠을 것이다. 남을 헐뜯고 다녔던 자신의 모습이 인상여와 크게 대비되어 더욱 나쁜 이미지로 인식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초라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모습에 화가나 인상여가 더 미웠을지도 모르지만 잘못을 모두 반성하고 인상여를 받아들이며 국가를 위해 헌신한 염파의 모습은 참다운 인간으로 성장하였다는 점에서 반가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장군이라는 직책을 가진 두 사람이 함께 국가를 지키고 전쟁터에 나간다는 것은 서로의 목숨을 함께 지킬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친구와 함께한다는 점에서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우정은 이들과 같이 삶과 죽음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중국이 고대시대에서부터 글을 쓰는 것을 즐기고 이에 대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고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불위라는 대상인이 장사를 할 때 볼모로 잡혀왔던 진의 자초를 도와주었고 자신의 첩까지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 그리고 자초가 제위에 오른 후 여불위는 문산후에 봉해졌고 숭상의 자리까지 올랐다. 장양왕이 죽은 다음 그의 아들 영정이 왕위를 물려받았으니, 그가 바로 진시황이다. 당시에는 문객을 두는 것이 성행해 여불위도 3천여명에 달하는 문객을 두었는데 이런 많은 사람들 각자의 견해와 꺠달은 바를 모아 집대성한 거작이 바로 여씨춘추 이다. 여불위는 이 책들을 진나라의 통일 경전으로 삼았고, 이 글의 한 글자라도 첨삭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상금 1천금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먼저 여씨춘추 는 중국 진나라 때의 사론서로 춘추전국시대의모든 사상을 절충, 통합시키고 세밀하게 분석하여 정치와 율령의 참고로 삼기 위해 저술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춘추전국시대에서 진나라로 통합되기까지 사상을 통합하기 위한 여러 노력이 있었고 진나라의 전국 통일에는 이런 사상에 대한 연구가 큰 작용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는 국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무도 중요하지만 문의 측면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 내용을 통해서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서 상상해볼 수 있는데, 진시황은 창업형 군주이기는 했어도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그림을 처음부터 일일이 그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국가를 물려받아 왕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에는 문객을 두는 것이 성행하였다는 것이다. 진나라에 법가 사상이 확립되지 않아서 이 또한 성행할 수 있었다고 짐작해볼 수 있는데, 진시황제 시대에는 모든 유가경전 등을 불에 태워 없앨 정도로 타 사상을 배격했기 때문에 도가의 사상의 색채가 진한 여씨춘추는 그 이전의 일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본다. 또한 문객이 성행했다는 점에서 역시나 중국은 고대 시대에서부터 민중과 문학은 뗄 수 없는 관계였고 이런 엄청난 문학 담당층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의 사회상을 문학을 통해 잘 그러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원대한 포부를 가슴에 품어라! 홍곡지지라는 말은 진나라를 멸망시킨 진승과 오광의 난에 관한 고사성어이다. 진승과 오광은 진말, 무거운 조세 부담과 고된 요역, 가혹한 형벌로 농민들이 살아가기 힘든 시대에 살아갔던 사람들로,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남의 논밭에서 일을 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갑자기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 다른 사람들에게 나중에 부자가 되어도 오늘 함께 이토록 고생스레 밭일했던 것을 잊지 맙시다.”라고 말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조하고 한탄했다. 그리고 그들은 수비대로 징집을 당했는데 제 날짜에 나라에 도착하지 못하여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자 진승과 오광이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기회로 생각하고 농민기의를 이끌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이들에 호응하면서 기의는 급속히 확산되었다. 비록 진승과 오광은 기의를 일으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었지만 각지에서 일어나 농민 무장 부대는 결국 진 왕조를 타도했다.

이 이야기 속에는 국가의 쇠퇴기에 국역을 겪으며 가난과 굶주림으로 고통당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또한 국가의 강력한 법체제로 인하여 별다른 죄를 짓지 않았지만 병사들이 제 날짜에 조국에 다다르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하게 하는 강력한 진나라의 법체제도 엿볼 수 있으며 농민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으면 국가를 타도하는 봉기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통해 고대 시대의 고단한 농민들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볼 수 있다. 과연 그들이 정말로 부자가 되어도 함께 일했던 이들을 잊지 않고 챙길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함께 자신들을 억압하고 자유에 제재를 강하는 국가에 대해 저항하였다는 점에서는 큰 의의가 있는듯하다. 또한 아무리 강력한 법 체제를 구축한 국가라도 민심을 잃으면 국가는 망하기 마련이라는 사실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마지막으로 춘추전국 시대의 우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한다. 진나라는 이웃의 소국인 우와 괵을 침략하고자 하였으나 우를 침략하면 괵이 출병하고 괵을 침략하면 우가 출병하는 탓에 거사가 치루어지는 것이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우국에 진귀한 보물을 주며 괵나라로 가는 길을 빌렸는데 우공은 명마와 보석을 얻고 무척이나 좋아했다. 신하가 우공을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진은 괵을 쳤고 돌아오는 길에 우에 머무르며 빼앗은 재물 가운데 상당량을 우공에 바쳤다. 우공은 기뻐했고 진의 군대를 우나라 수도 부근에 주둔시켰다. 그런데 며칠 후 경성에서 거센 불길이 타올랐고 우공이 성 앞에 갔을 때는 이미 진군이 경성을 점령한 뒤였다.

당시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침략전쟁은 많은 목숨들을 앗아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왕들의 권력 다툼과 영토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전략을 잘 짜고 한 순간도 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진나라와같은 교모한 책을 쓰는 이들에 의해 나라가 침략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국은 참 어리석다. 괵이 멸망하면 자신들의 국가를 도와줄 연맹국이 사라진다는 것을 어떻게 모를 수 있는가. 한치 앞의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단지 눈앞에 있는 횡재에 눈이 먼 우국의 왕은 우리에게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이렇듯 진나라는 진승과 오광의 난에 의해 멸망하긴 했지만 강력한 당시 주변국들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동방의 6국들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천하 통일을 이룬 강력한 국가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을 바로잡고 주변국을 통일한 최초의 창업형 군주, 진시황제는 가히 새로운 개념의 군주상으로 칭송되며 황제라는 칭호를 얻을만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사기 속 여러 이야기들, 그리고 그 이야기 속 인물들의 다양한 인생을 통해 나를 포함한 모든 독자들이 다양한 교훈을 얻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운명은 현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과 전혀 무관하지 않고, 일견 모순되거나 상충되어 보이기까지 한다. 중국이라는 광활한 땅에서 문명을 이루며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갔던 고대 중국인들의 삶의 현장을 이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해보며 생생한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선사시대, 청동기를 사용하던 시대, 글자가 만들어지고 글이 쓰여 지던 시대... 이렇게 중국의 역사는 발전하였고 인간의 문명은 진화하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영토가 비옥하고 물이 많은 지역은 풍요로웠고 그렇지 못한 지역은 척박한 땅을 일구며 생활하여야하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의 이런 차이들은 문학의 차이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춘추전국시대의 치열한 생존싸움 아래 펼쳐진 개개인들의 힘겨운 삶은 우리에게 다양한 교훈을 준다. 지혜를 갖는 사람이 되라는 것,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기를 항시 대비하라는 것, 누구에게든 밉보이면 득이 될 게 없다는 것 등이 그 예이다. 중국 고대사를 사관에 입각해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 사기 는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끼쳐 김부식의 삼국사기 가 탄생할 정도로 파급력이 대단했다. 그 생명력의 원천은 인간의 고뇌의 산물이라는 점에 있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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